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아이작 줄리언은 196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지난 30년 동안 런던에서 거주하고 활동하는 영화감독이자 영상 설치작가이다.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즈에서 수학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앤디 워홀의 실험영화, 데렉 자만의 영화세계 그리고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 작업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89년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웠던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삶을 소재로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 문화의 내면을 다룬 영화 로 뉴 퀴어 시네마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어 1991년 장편영화 로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상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 서부에 대한 신화 속에서 백인 남성의 성적 욕망과 정체성을 다룬 영화 은 미술계에서 그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되어 작가는 2001년 영국의 터너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흑인 정체성을 주제로 작업하는 영국 대표 작가로서 스티브 맥퀸이나 잉카 쇼니바레와 같은 예술가들이 있지만, 아이작 줄리언만큼 흑인 남성 욕망의 표출을 시각문화 영역에 온전하게 적용한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 필름 누아르와 펑크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 그리고 흑백사진은 그의 영화작업의 뿌리가 된다. 상이한 성적 정체성과 각기 다른 인종의 타자들이 공존 가능한 이상적 공간을 추구하는 그의 예술세계는 ‘정치의 미학’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 과거 역사의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치유한다는 의미에서 ‘배상의 미학’으로도 해석된다. 이 시대의 정치적 예술에 천착하는 그에게 비판적 예술이란 예술이 삶과 유리되지 않는 것 또는 예술이 삶의 비인간적 조건에 대해 저항하거나 전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작 줄리언은 동시대 어떤 작가보다도 사회 참여적이고 시각적으론 육감적인 예술적 실천을 지속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개인전을 통해 작가는 글로벌 환경 하의 자본주의, 노동 그리고 미술 시장과 같은 오늘의 현실이 회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한다. 탈식민주의, 이민과 디아스포라 그리고 인종과 성적 정체성의 차이 등을 다뤄온 작가는 주요 출품작 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모순과 한계를 묵시론적 시선으로 그려낸다.
PLAYTIME, 2014
작품의 제목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자크 타티의 (1967)에서 차용했다. 자크 타티의 영화가 초현대적 파리의 도시적 삶의 묘사를 통해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언했다면, 아이작 줄리언의 영화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21세기 심미적 번역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아이작 줄리언은 자본주의의 과잉과 실패 그리고 이런 본질적 모순을 반영한 미술계를 해부하며, 정보와 노동 그리고 돈의 비물질적 흐름에 대해 가시적 형태를 부여한다.
이 영화의 특징은 등장 인물들의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 아트딜러(제임 프랭코 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작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잉그바르 에거트 지그로손 분), 그리고 두바이의 필리핀 출신 가정부(메르세데스 카브럴 분), 이 세 주인공들은 동경의 눈초리로 도시, 초현대적 건축물 그리고 예술작품 등의 사물들을 물신주의 방식으로 바라본다. 아이작 줄리언은 본 작업에서 기존 영화사 속의 다양한 장면들과 촬영 기법들을 인용 혹은 전유하면서 모든 에피소드들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 주제로 ‘자본’을 설정하고 있다. 때문에 ‘자본’은 이 영화에서 일종의 맥거핀 역할을 수행한다.
KAPITAL, 2013
아이작 줄리언은 신작 제작을 위해 오랜 기간 이론적 리서치를 진행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진행하면서 작품을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가는 제작을 위해 2013년 런던의 헤이워드 미술관에서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데이비드 하비와 21세기 현재 『자본론』의 의미에 대한 공개 대담을 진행했다. 2채널 영상으로 구성된 이 영상 작업은 공개 대담의 기록 영상을 바탕으로, 비물질적이면서도 또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의 구체적인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재편집한 독창적인 포맷의 다큐멘터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THE LEOPARD, 2007
는 2007년에 제작한 5채널 필름 설치 작품 의 싱글 채널 버전이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화려한 바로크 풍의 궁전을 배경으로 촬영한 이 작품은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북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밀입국하려는 난민들의 위험 가득한 여정이 이 장소를 배경으로 재연된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판타지와 현실이 혼재된 영상은 서구의 근대가 품어왔던 꿈과 실패한 희망에 대해 성찰한다.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러셀 말리펀트의 춤은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상상의 공간을 펼쳐 보인다.